lacri [2] · MS 2002 · 쪽지

2013-06-08 09:06:32
조회수 11,668

수학 B형 30번 논쟁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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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수학 문제의 풀이 방법이라는 지극히 학문적인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참 순수하고 보기 좋습니다. 논쟁에 참가하는 한 분 한 분은 나름의 주관이 있고 그것이 공격받을 때 기분도 상하겠지만요. 수험생이나 대학생 시절을 훌쩍 넘은 지금 와서 보면, 앞으로 내 인생에 라그랑주 승수법을 두고 밤을 새워 싸워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이라도 올까 하는 부러움이 큽니다. 


제가 대학에 가던 시절에는 정시에서 정원의 70%를 뽑았습니다. 정시에서는 수능 점수가 왕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능 시험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겠다는 악과 깡이 공간의 한 틈 한 틈까지 가득 채우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꼼수는 로피탈과 외적을 쓰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객관식 문제는 다 답을 알겠는데 21번 하나만 모르겠다, 그러면 21번을 제외한 나머지 문제들의 답을 세고 그 중에서 선택지 수가 제일 적은 것을 21번 답으로 써라 - 그 시절 꼼수는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희 시절의 철학은 '흑묘백묘'였죠.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

포카칩, 난만한 님은 수능도 잘 봤지만 그 어렵다는 명문대 수학 논술 시험을 뚫고 들어간 분들이죠. 지금도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고요. 논술 시험에서는 결과적으로 답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중간 풀이과정에 비약이 있으면 심하게 감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에 대해 아무래도 더 비판적일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몸에 배면 실제로 논술 시험지에 감점 요소들을 남겨놓게 될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교조적인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이렇게 했습니다. 수능 시험장에서는 일단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가장 빨리 답을 찾을 수 있는 풀이법으로 30번까지 싹 풀어 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막히는 문제가 있어서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나머지 문제들을 우아하게 푸는 것보다는 맞을지 틀릴지 모르는 문제를 맞히는 게 더 중요하므로 막히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라도 풀어내죠. 하지만 보통은 문제를 풀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첫 문제부터 30번까지 처음에 푼 것과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봅니다. 너무 뻔한 문제라서 다르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 정도라면, 내가 고른 답 말고 다른 답을 대입해서라도 그 답들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고 넘어갑니다. 이게 바로 '검산'이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처음 내가 고른 답이 맞다는 걸 확인하면 만점을 훨씬 높은 가능성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이 과정에서 잘못된 계산을 바로 잡고 4점을 더 벌기도 하죠. 

종종 학생들이 '다 아는 문제였는데 실수로 틀렸어~'라고 하는 모습을 특히 수학 문제를 풀 때 자주 보게 되는데, 보통은 수학을 잘 하는 학생들도 한 번 풀어서는 운이 좋으면 100점을 받지만 계산 실수라는 것이 항상 있기에 96점이나 97점, 심하면 92점까지 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이 검은 고양이가 못 잡은 쥐를 흰 고양이가 잡게 해서 안정적으로 100점을 받죠. 30문제 중에 보통 1개 정도 실수를 한다 치면 오류가 발생할 확률이 3%인데, 서로 다른 두 개의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풀면 동일한 문제에서 두 번 실수를 할 확률이 0.09%까지 떨어지잖아요.


여러분들도 두 마리 고양이를 키워서, 수시 논술 시험을 보러 갈 때는 흰 고양이만 풀고, 수능 시험 장에서는 두 마리를 다 풀어서 최대한 많은 쥐를 잡아 보는 게 어떨까요? 

물론 더 힘든 길이죠. 사료값도 많이 들고.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면, 힘든 길의 끝에 항상 보상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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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치맛김치 · 416531 · 13/06/08 10:10 · MS 2012

    결국 라끄리님까지 등장..

  • 대서인울의 · 368000 · 13/06/08 10:21 · MS 2011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루림타 · 145222 · 13/06/08 11:37 · MS 2017

    대장님 등장...^^ 잘읽었습니다..

  • 鐘進 · 445700 · 13/06/08 11:43 · MS 2013

    멋있다..

  • Logician · 412229 · 13/06/08 11:48

    얼마나 공부를 해야 이런글을 쓸수있는건지..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글과 상관없는 얘기지만
    lacri님 생각엔 수능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150일은 어느정도 변화가 가능한 시간이라고 보세요 ?

  • lacri · 2 · 13/06/09 08:50 · MS 2002

    요즘 수능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게 아니어서 어느 영역이든 3등급 중반 정도부터는 1등급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해요. 너무 초조해 하지 말고 우직하게 밀고 가세요.

  • 김밥데스네 · 447852 · 13/06/15 07:43 · MS 2013

    헐 감사합니다 근데 영어는좀 많이어려워진거같아요

  • 인시그니아 · 449264 · 13/06/08 11:51 · MS 2013

    역시 라끌옹님..

  • 진격의오르비 · 369161 · 13/06/08 13:50

    대장님이다 ㅋㅋㅋㅋ

  • 진선생 · 444778 · 13/06/08 14:31 · MS 2013

    대단하십니다.. 처음으로 리플을 남겨보는듯...~

  • 리피에노 · 351257 · 13/06/08 14:31 · MS 2010

    수학 B형의 출제 범위는‘ 수학Ⅰ’,‘ 수학Ⅱ’,‘ 적분과 통계’,‘ 기하와 벡터’
    이다.‘ 수학’의 내용은 간접적으로 출제 범위에 포함된다.

    -2014학년도 수능 대비 학습방법안내.pdf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홍삼Drinker · 443624 · 13/06/08 14:37

    진리의 결론인듯 대장의 '클래스' (이럴때는 비교하는게 아니니 써도 되는건가요?)

  • 슬라무 · 405099 · 13/06/08 14:51 · MS 2012

    그래서 한완수가 나와잇는거죠 'ㅁ' 크포(교과서적 개념에 충실한 풀이법) + 심화특강(비교과적인 요소가 잇지만 그래도 교과서로 유도해낼수 잇고.. 빠른풀이가 가능한..)

  • Rina_K · 405674 · 13/06/08 15:20 · MS 2012

    멋진 결론 감사드립니다.
    라끄리님의 글에선 언제나 깊은 연륜이 묻어나네요.
    언제나 제 롤모델이십니다.^^

  • MorningSnow · 402672 · 13/06/08 20:21 · MS 2012

    라끄리 님이 보실지는 의문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 수리영역 시간에 문제를 다 풀고 시간이 많이 남을 정도로
    실력을 올렸나요??

  • lacri · 2 · 13/06/09 08:55 · MS 2002

    계속 공부하고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산수도 빨라지고 더 정확해집니다. 발상에 소요되는 시간도 줄고요.
    처음엔 푸는데 90분 걸릴 문제들이 나중엔 80분 걸리고, 60분 걸리고 그럽니다.
    공부 앞에 장사 없어요. 90분 동안 풀어서 80% 확률로 만점 받는 사람이 이제 됐다고 자만 안 하고 계속 갈고 닦으면 나중엔 70분 동안 풀어서 95% 확률로 만점 받게 됩니다.

  • 바람의목소리 · 43399 · 13/06/08 20:56 · MS 2004

    좋은 토론이였던거 같습니다 ^^ 하지만 평가원에서는 아마도 .... 이 논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 Shy14 · 311050 · 13/06/09 01:47

    결국 광복님이 나오셔서 정리.. 끝

  • 해원(난만한) · 347173 · 13/06/09 03:36 · MS 2010

    한완수에 말하는 바와 어느정도 일치합니다.

    다만 무엇이 고교과정인지, 출제의도인지만 잘 구분하고, 공부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포카칩이 잠수까지 타고, 인신공격이나 하는 싸움으로 번져 안타깝네요. ㅠ 그럴일도 아니었는것 같은데..

  • 냐냠 · 449636 · 13/06/09 20:25 · MS 2013

    라끄리님 사랑해요 그리고위엣분들 언급좀그만

  • 셔니꾸 · 449415 · 13/06/10 22:38 · MS 2013

    아 막막하구나 ㅠㅠ

  • 인제의14학번 · 434978 · 13/06/11 02:28 · MS 2012

    필력이 너무 좋아서 누구신가 했더니... 그분이셨군요 하하 예전 글들 찾아 읽고 있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이 많아서 많이 놀랬어요.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군요. 하지만 미래는 당신과 비슷해지기를 희망합니다^^